회고록

일식 CEO 출신 주니어 개발자 2021년 회고록

빈코 2022. 4. 29. 16:51

본문에 앞서 기존 블로그에서 현재 블로그로 이전했기 때문에 이 글은 작년에 썼던 회고록이며 1년 치의 회고록이 아닌, 개발에 입문하기 전까지의 저의 다사다난했던 삶을 기록했습니다.

 

회고록
회고

 

일식 CEO 출신 개발자의 길을 걷다

2021년 회고록이지만, 나의 26년을 뒤돌아 본 회고록을 쓰려한다.
당사자인 나도 생각하지 못한 길인 '개발자'라는 직업을 어느 누가 생각이라도 했을까?
어느 날, 뉴스에서 한국 성인들은 일평생 평균적으로 직업이 3번 바뀐다는 통계표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지금 나는 26살 어린 나이에 한 번의 직업이 바뀌는 과정안에 있다
내 첫 번째 꿈은 뭐였을까?
첫 번째 꿈이 생긴 군대 시절로 시간을 거꾸로 흘러가 본문을 시작하려 한다

 

 

22년 평생 책에 손을 대지 않던 아이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누구나 아는 TV 프로그램일 것이다. 독서와 관련해서 강의를 하던 강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아기 때의 독서량이 가장 높고, 성인이 되었을 때 가장 낮은 나라라고 하였다. 나는 그 평균이 나온 통계에 한몫을 두둑이 하고 있던 사람이다(읽은 책이 한 권도 기억이 안 날정도) 하지만 이런 나를 바꾸는 한 권의 책, 아니 그 책의 단 한 문장이 나를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나는 21살 2월에 군입대를 하고 그 해 5월부터 전역할 때까지 직속 간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힘들었던 과거를 굳이 숨기며 아파하고 싶지는 않다. 뉴스를 볼 때 누군가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사례를 보게 되면 "신고하면 되지 않나?"라는 무책임한 말을 많이 했었다. 직접 그 상황에 처한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1년이 흐른 후에 더 높은 간부님께 말씀드렸지만 묵인되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보급병이어서 일반 병사들과는 다르게 혼자 일과를 하러 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그것으로 인해 나를 볼 때마다 폭행하던 간부는 나의 위치를 알기에 어려웠고, 나는 일과가 느슨한 날에는 그 간부가 절대 오지 않는 곳 '도서관'에 머물러 있곤 했다.

핸드폰도 동기도 없던 그곳에서 나의 심심함을 달래 줄 유일한 수단은 '책'이었다. 자연스레 수많은 에세이 책과 자서전들을 접하게 되었고, 책의 저자들의 실패와 성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쓸 수 있는 독후감이 많아지고 가독성을 높게 글을 쓰는 방법도 은연중에 알게 된 것 같다. 군대 내에서 열리던 독후감 대회에 매달 입상하게 되었고, 사단에서 열리는 만화대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저를 대회에 작가 역할로 적극 추천해주시던 또 심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셨던 정훈장교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언어치료 청각재활학부)에 복학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도 함께 할 시기였다. 그저 성적 맞춰서 간 학교와 들어갈 수 있는 학과를 선택했던 나였기에, 그 전공은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나에게 맞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냈었다

'산을 올라가는 길은 수만 가지의 갈랫길이지만, 결국 오르고 나면 정상에서 만나게 된다'

책에서 읽은 한 문장. 이 문장으로 인해 나는 생각할 시간이 많은 '군대'안에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꿈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참모부였기 때문에 근무를 서는 것이 '불침번'이 아닌 '상황병'이어서 하루에 많게는 12시간 동안 앉아서 근무를 서야 하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생각할 시간도, 책을 읽을 시간도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 같다.

 

 

꿈이 생기다

처음으로 가진 꿈은 '서비스업' 이였다. 난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참 좋아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잘해왔던 것 같다. 물론 군대 안에서 폭행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느꼈었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던 부분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어서 그저 그렇게 간단하게 꿈의 틀이 잡히게 되었고, 그때 한창 에세이 책과 자서전을 읽다가 '이경태, 정연강의 밥장사 멘토링'이라는 책을 읽고 '나만의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책밖에 정보가 없던 나는 답답함을 느끼고, 주변 지인 중에 가게를 차린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학교 선배(일면식도 없는 사이) 중에 한 분이 가게를 차렸다는 얘기를 듣고 무턱대고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취했다.

 

선배와의연락
많은 내용이 있지만 짧게 첨부!

 

처음에 찾아뵈러 갔을 땐 시간이 맞지 않아 아쉽게 못 뵈었지만, 그다음 휴가 때는 시간을 맞춰서 거의 한 시간 가량 조언을 들으면서 메모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책과 실제로 가게를 차려본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간접적 경험을 통해 꿈을 키워나갔고, 군 전역을 하게 되었다

 

전역사진
맹호부대 전역

 

꿈이 아닌 비전으로

군 전역을 하고 전역 선물로 부모님께서 친형과 유럽여행을 보내주셨다. 처음에는 정말 잠을 못 잘 정도로 들떠 있었는데, 여행 내내 많은 스케줄로 너무 힘들었다 여행 1주일 차가 된 날 포르투갈의 신트라(마법의 성을 찾아가는 길)를 가게 되었다. 신트라로 가는 길에 무어 성이 있었는데, 이 성을 올라갔을 때 형은 나에게 꿈이 있냐고 물었다.

막연하게만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구체적인 꿈을 말할 수 없었고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형은 그런 나에게 "이 낯선 곳에서 너의 꿈들을 크게 외치고 가라. 그리고 먼 훗날, 이곳에 다시 왔을 때 그런 사람이 돼있어라"라고 말했다.

수많은 외국인 앞에서 내 꿈을 소리치는 것도 어려웠지만, 내가 가진 꿈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꿈들인지 확신에 차지 않아서 자신있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어떤 직업', '얼마 큼의 연봉' 같은 구체적인 꿈이 아닌 4가지의 비전을 세우고 외치게 되었다.

  • 20대에는 CEO가 되자
  • 30대에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나와 같이 고민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조언해주는 강연을 하자
  • 40대에는 자서전을 쓰자
  • 50대가 지나고 유기견 센터를 차리자

그렇게 나는 낯설고 먼 타지에서 나의 비전을 외치고, 그 내용들을 미래의 나에게 편지로 쓰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유럽
비전을 외친 자리



요식업의 길

한국에 돌아와 나는 바로 바쁜 가게들을 찾아다니면서 구직을 하였다. 그때 당시 '일본 라멘'이 열풍이었고, 평소 면을 좋아하기도 해서 라멘 가게로 취업을 하였다(아르바이트)

그 가게는 회사에 소속된 직영점이었는데, 지원했을 당시 둔산동점 오픈을 하고 있었고 지원하여 붙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구했던 인력들이어서 나 빼고는 요식업 쪽으로 경력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초기 가게 세팅에 관한 의견을 많이 내게 되고 대표님 또한 눈여겨 봐주셨다. 또 매일 30분 일찍 가서 청소도 미리 하고 그랬다 (솔직히 과외시간 끝나고 할 게 없어서 간 거였다). 그래서 정직원을 제안하셨고 나는 거절하였다.

나는 군대 안에서 워킹홀리데이를 알게 되고 준비 중이었다. 파트타임을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도 일어를 공부하고 일하기 전에는 과외를 받으면서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한번 더 날 찾으셨고 "요리를 하고 싶으면 일본으로 워홀을 가고, 장사를 하고 싶으면 옆에 남아라"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날 이렇게 붙잡는 감정은 처음 느껴 봤었다. 또 그만큼 신뢰가 강한 말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준비하던 것을 미루고, 오직 요식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버림받아지면 난 워홀을 준비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가게를 위해 힘썼고, 그 노력을 회사 측에서 인정해주어서 어린 나이에 '과장-실장'을 넘어 슈퍼바이저가 되었다.

 

슈퍼바이저
SV

 

슈퍼바이저가 되어서 전국구로 많은 점주님들의 가게 오픈을 도와주러 출장을 다녔었다. 대전에서 시작해서 하남시부터 부산광역시까지 총 5개의 지점 오픈을 도맡았었다.

그러다 보니 가게 오픈에 대해서 자신감도 생기게 되고, 부모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저금을 꾸준히 해왔어서 첫 번째 비전 '가게'라는 나만의 사업체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었다.

이런저런 상황들이 정말 운 좋게 형성이 되었고, 나는 24살 어린 나이에 나만의 사업체를 갖게 되었다.

 

명함
명함

 

하지만 막상 가게를 차려보니 정말 경영하는 것이 어려웠다. 세금/식자재/거래처/매출 등 관리할 것도 정말 많았지만 제일 어려웠던 것은 사람관리였다. 직원&아르바이트생들과 잘 지냈지만, 그 친구들도 자신의 꿈에 뛰어들 때는 붙잡을 수 없었고, 그렇게 하나둘씩 일하는 직원들이 바뀔 때마다 그 직원의 성격을 파악하기도 그리고 '어느 정도 선을 두고 다가가야 불편해하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 가게에 취업했던 친구들은 정말 자기 가게처럼 열심히 해주었고, 본인들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됐던 일들을 도맡아서 하려는 모습들도 많이 보였다 (실명을 거론할 순 없지만 지금도 너무 고마워)


우리의 노력을 알았던 걸까? 우리는 2달도 채 안돼서 배달의 민족 맛집 랭킹에 올랐고,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가게가 되었다

 

배민댓글
마음 따뜻해졌던 리뷰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였다. 가게를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불매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 '넌 한국인 아니냐'라는 질문도 많이 하셨다. 하지만 고객들은 냉정했다.
선입견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그 이상이었고,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나름대로 가게 정문에 태극기를 크게 걸어놓기도, 일본 식자재 발주가 들어올 때는 가게 앞에서 받지 않고 멀리서 짐을 내려 끙끙거리며 가져오기도 했다. 또 오시는 손님 한분 오실 때마다 주방에서 나와 한국인임을 은연중에 알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판
아무런 잘못 없이 손가락질 받던 그 시절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분들 중에서는 가게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들어오셔서 침을 뱉으며 욕을 하고 나가시기도 했다. 또 밖에서는 지나가시면서 손가락질을 하시고, 가게 앞에는 'No Japan' 현수막이 여러 개 걸리기도 했다. 나도 사람이라 그런지 자꾸만 안 좋은 소리를 듣다 보니 '내가 정말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가게에서 식사를 하신 손님들의 "힘내세요"라는 말도, 배달 리뷰에서 응원해주시는 말들도, "사장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라며 나를 다독여준 알바 친구들도,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걱정이 있었기에 정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버틸만했는데..
내가 비판받지 않아도 될 말들은 한 귀로 흘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만 하면 된다 생각했는데..

불매운동이 끝날 즈음에 코로나를 직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운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이건 아닐 거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그렇게 난 주저앉아버렸다. 꾸준히 다니던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미안하다고 다른 일자리 찾아봐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할 때
난 그때의 그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난 코로나가 발생한 지 3개월 차가 된 2020년 5월 폐업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 

여행사진
나홀로 여행

냉랭한 사회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난 혼자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나 홀로 여행'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나에게는 상상도 못 할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정말 혼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혼자 여행하는 내내, 어느 날은 괜찮다고 나 자신을 위로하기도, 또 어느 날은 자책하며 나 자신을 꾸짖기도 하였다.

'사장'이라는 타이틀이 참 무거운 자리인데 그저 꿈에 부풀어 너무 이른 시간에 '사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던 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불매운동 때도 코로나 기간임에도 장사 잘되는 곳은 있었다. 그런 광경들을 보면 단지 나는 '불매/코로나'라는 방패로 나의 부족함을 숨기려 했던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제주도 여행을 하다가 어느 한 카페에서 가지고 온 책을 읽었었다. 윤소정 작가님의 [인문학 습관] 군대에서 정말 힘들었을 때 옆에 끼고 살았던 책이었다. 이 책은 '때로는 글자의 힘이 말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만큼 난 이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고, 마음을 다잡기도 하였다.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말에 중점을 두곤 하는 것 같다. 제주도에서 인문학 습관을 읽고 있을 때,
군대에서 힘들 때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구가 눈에 띄었었다

토끼와 거북이

 

대중적인 이 우화는 '부지런함'에 대한 교훈을 남김과 동시에, 다른 메시지도 함께 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정말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을 때, 거북이는 어떻게 해야 경주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한참 동안 고민해도, 답은 생각나지 않았었다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바다로 나가는 것'

이 이야기를 나의 삶에 빗대어 봤을 때,
나는 거북이였고 육지에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또 나의 부족한 면은 인정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너무 질책하던 나에게
내가 나라는 것에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그리고 윤소정 작가님은 매일매일 자신에 대한 질문을 블로그에 게시하라고 전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써지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좋은 그릇에 감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끊임없이 글을 올리다 보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쓰는 꾸준한 기록은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

이때 나는 '이렇게 주저앉아있을 시간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게 '왜 열심히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도 많이 하였다. 해답은 정말 간단했다.

유럽에서 외친 나의 비전들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당장의 현재, 또 앞으로 나가야 할 미래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여행을 끝내게 되었다.

 

 

개발자의 길

코로나로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연구소에서 시약 재고관리 업무를 주로 하시는데, 아버지의 회사에도 코로나로 인해 직원 수가 줄게 되어 아버지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부트캠프로 세 달간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고 '점프 투 장고'라는 책을 교과서 삼아 처음으로 웹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다

 

웹사이트
Python-Django 클론코딩

'재밌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요식업은 무언가를 진행하여도(신메뉴 개발, 광고 등) 바로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은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 때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류를 해결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걸 몸소 느끼면서 개발자라는 직업에 눈을 띄게 되고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또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국비지원제도를 알게 되고 신청하게 되었다.

 

 

국비지원 

나는 개발자 인맥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내가 국비지원을 지원했을 당시에는 파이썬 언어로 클론 코딩할 줄만 아는.. 말 그대로 초짜였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Java' 시장이 훨씬 활성화되어있다는 얘기를 듣고, java언어로 웹페이지를 만드는 커리큘럼을 찾아서 국비지원 신청을 한 거여서 파이썬 배웠던 3개월의 시간도 그렇게 큰 이점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조금씩 비슷한 부분이 보여서 도움이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나는 내 인생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것만 믿고 학원 수업은 시작되었다.

1주 차 2주 차 흘러가면서 점점 따라가기 힘들어졌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남들 4년 동안 배워오는 걸 6개월에 압축해서 따라가는 과정이어서 중간에 이탈자도 많았다.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수업시간에 코드만 따라 치기 바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매일 7시간 동안 수업이 진행되지만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3~4시간 자습을 하였다. 그리고 학원 내에서 열정적인 친구들에게 스터디를 제안하였다. 내 성격 중에 가장 큰 장점이 추진력과 잘 꾀어(?) 낸다. 그렇게 친구 2명과 함께 스터디를 진행하게 되고 후에는 한 명이 더 추가되어 4명에서 평일/주말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스터디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할 때는 공부 내용을 공유했다

 

평일 스터디는 언어와 프레임워크 복습과 예습을 하였고, 주말 스터디는 프로젝트, 독서 스터디를 진행하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4명 다 비전공자여서 강사님이 퀴즈를 내도 잘 풀지 못하였다. 하지만 꾸준하게 스터디를 하면서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다 보니 학원이 끝날 즈음에는 학원 내에서 중상위권 실력을 갖게 된 것 같다.

 

개발자는 협업이 정말 중요하다고 얘기를 들어서 스터디를 같이 하는 친구에게 토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지금까지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국비 학원에서 총 2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2번 다 개인적으로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왔고, 진행하는 과정 하나하나 팀원들과 소통하고 협업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특히 최종 프로젝트 전에는 학원 내에서 혼자 사전발표를 진행하면서 원하는 팀원들과 원하는 주제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최종 팀 프로젝트 사전발표

글을 쓰기에 앞서, 최종 팀 프로젝트 사전 발표는 학원 내에서 나 홀로 진행되었다 비전공자 출신인 내가 4개월의 과정을 거치면서, 따라가기 힘든 부분들이 많은 만큼 혼자 자습하는 시간이 많

woongbin96.tistory.com

 

1차 프로젝트가 끝났을 당시에,  하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토의를 했을 때 한 가지 의문이 들었었다. '이건 프로젝트 전에 주제에 따라 하고 싶은 사람끼리 모였다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최종 프로젝트 때에는 그렇게 진행하면 좋을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강사님께 나의 의견을 제시했었다.

 

강사님께서는 '그러면 네가 준비해봐'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을 듣고 일주일간 UI를 구성하고 하고 싶은 기능들과 이런 기능들을 왜 하고 싶은지 그리고 이 주제(제주도)가 가진 장점과 내가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너무 떨렸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물론 그 발표로 인해 좋은 경험을 한 것뿐만 아니라 좋은 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수강했던 국비지원 과정에서 전공자가 2/3를 차지했을 만큼 전공자분들의 비중이 훨씬 많았다. 그분들의 실력에 비하면 내가 많이 부족했었겠지만, '팀장'의 자리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 마음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주제의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발표를 하여 팀원들을 모을 수 있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팀원들을 이끌며 성공리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GitHub - JejuislandToyProject/JejuIsland: 제주도 홍보 팀 프로젝트

제주도 홍보 팀 프로젝트. Contribute to JejuislandToyProject/JejuIsland development by creating an account on GitHub.

github.com

 

 

개발이라는 '미로'

주말 스터디가 끝나고 같이 토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친구가 술자리를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친구가 고민을 털어놨었다.

"웅빈 난 비전공자여서 그런지 매번 수업 때마다 이해하기 힘들어. 그래서 매일 밤늦게까지 그 문제를 이해하고 블로그포스팅까지 하고 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솔직히 나도 그렇다. 나도 같은 비전공자 출신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이전에 그 친구에게 이동욱 개발자님의 '기억보단 기록을'이라는 블로그를 소개해주었었고, 윤소정 작가님의 '기록의 중요성' 등 매번 그 친구에게 블로그 기록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 친구도 나와 같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블로그뿐만 아니라 스터디 제안도, 독서 제안도 항상 내가 해왔어서 그런지 나에게 그런 고민을 털어놨던 것 같다.

그 친구도 요식업을 하던 친구였는데, 정작 본인도 전공자들이 자신보다 잘하는 게 당연한 걸 알면서도 조급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남을 인정하라고 말했다. 나는 어떤 직업의 길이여도 남들과 비교하며 자책하면 안 된다고 제주도에서 수 없이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그때 당시의 내 감정을 공유했었다.

그런 와중에 문득 '미로'가 생각났다. 나는 개발이라는 직업에 들어선 다는 것은 미로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발에 입문하였을 때 개발은 정말 광범위한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우리는 지금 미로에 들어와 있고, 후에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졌을 때 우리가 기록해두었던 방향들을 보면서 찾아갈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난 이 말을 내뱉고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멋있게 말하고 내가 안 하면 안 되니깐...) 그래서 매일 블로그 포스팅을 하던 것을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었고, 포스팅을 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더 하게 되었다.

항상 내가 서 있는 이 길은 '미로'라고 생각하고 개발자가 되었을 때도 꾸준히 기록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취업 

정말 많은 곳을 지원하였고 나름대로 '받아준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지 말자'라는 쓸데 있는 자존심도 부려가며 취업을 준비했다. 총 4개의 회사에 면접을 봤고, 3개의 회사에 합격했다(모두 솔루션 회사) 첫 번째 회사는 안경 관련 웹서비스였는데, 첫 면접이기에 너무 떨었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정말 기초적인 것들을 물어봤는데 그걸 대답을 못했다.

 

당연하게 생각하며 썼던 기술들이었기에 하나도 준비 안 하고 오히려 어려운 용어들을 달달 외워갔는데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멘붕이었다.  그다음 날 바로 면접이 있었기에 새벽까지 기초 용어들만 쭉 나열해가면서 외웠다. 그리고 각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지원동기 등 다르게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외울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면접장에 가보니 또 달랐다.

 

이곳에서는 java에 관한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기술은 왜 안 물어보지?'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면접관은 나에게 '혹시 저희 회사가 내년부터 python으로 언어를 바꾸게 될 텐데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을 하였다.

솔직한 감정으로 그 자리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그냥 앉아서 물어보는 것만 대답하고 나왔다. python언어가 물론 지금 java만큼 비중이 커졌고, 나도 python언어를 3개월간 공부를 해서 얼마나 편리한지 잘 알지만 언어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고 무엇보다 '네 카 라 쿠 배' IT 대기업들이 java의 영역이 넓기 때문에 후에 대기업을 지원할 때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합격 연락이 왔지만 난 다른 데를 더 찾아보았다. 

 

다음 면접은 모바일 통합마케팅 회사였다. 생각보다 질문이 많았고, 3명의 면접관이 들어와서 한 명은 인성 관련 질문만 한 명은 회사 관련 질문만 나머지 한 명은 기술 관련 질문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봤다. 그때 당시에 내가 지원했던 곳들보다 연봉도 사무실 환경도 면접 질문 수준도 맘에 들었다.

 

1차 서류가 붙고 2차 면접을 넘어 마지막 3차 면접까지 붙었다. 나름 21:1을 뚫었기에 뿌듯하기도 한편으로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수료한 지 3주 채 지나지 않고 취업을 바로 해서 다행이었다.

 

학원 강사님이랑 자주 연락을 하는데 강사님 말로는 "다른 얘들은 학원 끝났다고 다 놀러 다녀"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힘들게 6개월 과정을 끝냈으니 그럴 만도 한 것 같다. 근데 나는 어떻게 보면 조급했고 간절했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백수도 하루 이틀 놀면 막막해지고 심심해진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학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혼자 회사를 판단하고 지원하고 경쟁하면서 자신의 회사를 찾아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가졌을 때 바로 해야겠다는 판단도 들었고,  '무엇보다 이제는 전국에서 컴퓨터 전공을 한 친구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빨리 취업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어서 솔직히 수료 전부터 조금씩 넣고 있었다.

 

본론으로 넘어와 모바일 통합마케팅 회사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고, 본가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항상 같이 열심히 공부하던 친구가 (나랑 비슷한 날짜에 다른 회사 붙었다) '웅빈 여기 사업 늘린다고 몇 명 더 뽑는다는데 한번 지원해볼래?' 라고 말했고, 궁금해서 회사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고, 무엇보다 개발자 선배들이 많다는 것에 많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전에 붙은 모바일 마케팅 회사는 개발자의 비중이 그리 큰 회사가 아니었고, 친구가 취직한 회사는 개발자가 상당수인 회사이다. 그리고 항상 친구랑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 경쟁하며 또 모를 땐 도와주면서 함께 성장했기에 이 부분도 크게 작용해 지원을 넣게 되었다. 회사는 분당에 위치해 있고 솔루션 회사였다.

 

하지만 당장 그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이었고 (당시 금요일) 지원한 회사와 통화 결과 온라인 면접은 힘들다고 해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었다.

 

1. 그냥 붙은 곳 다닌다

2. 붙은 곳 포기하고 면접 본다

 

생각보다 취업이 어려운 시기이기에 원래라면 당연히 안전하게 1번을 선택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를 가르쳐줄 사수들이 있고, 무엇보다 잡플래닛 기업 평점이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모바일(붙은 회사) : 2.3

지원할 회사 : 4.0

물론 리뷰 개수의 차이가 있지만 실제 다녔던 사람들의 입장을 본 결과 마음이 확고해졌다. 

 

그렇게 난 이전 회사를 포기하고 다시 지원을 하고 면접 과정을 거쳐 12/7일 자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10일 정도 지난 지금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회사 소스들을 보면서 모르는 것들을 정리하고 선배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매일 아침 30분간 개발자들끼리 회의하면서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모르는 용어들을 정리하고 회사 프로그램 소스들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또 회사 이외에도 같이 취업한 친구와 퇴근하고도 토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매주 토요일마다 9시간씩 SQLD 자격증을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다. 학원 친구들과 간간히 연락하는데 지금 면접 보러 다닌다고 해서 면접 질문 정리해놓았던 것들을 공유하고도 있다.

 

아마 이번 업데이트가 2021년 회고록 마지막 업데이트가 될 것 같다. 앞으로 2주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열심히 살아갈 것 같고 다른 큰 이슈가 없을 것 같다. 2021년의 나 정말 고생했고 2022년에는 더 큰 사람으로 더 실력 있는 개발자가 되도록 노력하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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